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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仁顯王后)의 병은 척추결핵 본문

지혜를 찾아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병은 척추결핵

성지 2016. 3. 14. 15:49
- 사백열여덟 번째 이야기
2016년 3월 14일 (월)
인현왕후의 병은 척추결핵

[번역문]

  중전께서 며칠 전부터 좌우 양쪽의 다리에 통증이 나타나더니 어제저녁 이후로 통증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중략) 중전의 다리 통증은 오른쪽이 특히 심하며 환도혈(環跳穴) 위 허리 쪽 척추 부근이 현저하게 부어올라 통증을 참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밤이 되면 그 증세가 훨씬 심해진다 합니다. 신들이 여러 어의와 상의한 결과, 습열(濕熱)이 아래로 흘러 경락이 막혀 생긴 통풍증상이라고 모두들 말합니다. (중략) 이러한 증상은 대부분 낮에는 통증이 약했다가 밤이 되면 심해집니다.

[원문]

中宮殿自數日前, 有左右脚部疼痛之候, 昨夕以後, 痛勢倍劇. (中略)  中宮殿脚部疼痛之候, 右邊爲尤甚, 環跳上腰脊近處, 顯有浮氣, 痛難堪忍, 而夜分後, 症勢倍劇爲敎云. 臣等與諸御醫等相議, 則皆以爲濕熱下流, 經絡壅滯, 症涉痛風. (中略) 此等症情, 例多晝歇夜重.

 
- 『승정원일기 숙종 26년 3월 26일』





  조선의 왕후 가운데 가장 비운의 삶을 살았던 이를 찾는다면 단연 인현왕후(1667~1701)이다. 그는 열다섯에 왕비로 간택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러 해가 되도록 왕자를 낳지 못했고 또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에 휩쓸려 스물셋에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5년을 친정에서 보낸 후 궁궐로 다시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몇 년 후 병을 얻게 되고, 그 병으로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당시 의관이 진단한 그의 병명은 통풍(痛風)이다.

  1700년 3월 26일 아침 내의원이 세 차례에 걸쳐 보고한 바에 의하면, 인현왕후가 며칠 전부터 양쪽 다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하더니 전날 밤엔 아주 심해졌는데, 오른쪽 다리의 통증이 특히 심하고, 환도혈(環跳穴), 즉 엉덩이 고관절 위 허리 쪽 척추 부근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인 5월 12일부터 그 자리에 고름이 생기기 시작하여 이듬해 8월 14일 숨을 거둘 때까지 이 증상은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무릎 위로 통증이 옮겨 다니거나 다리에 냉기가 돌기도 하고 복부가 부어오르기도 하는 등 여러 증상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의학정보에서 통풍을 찾아보았더니, 혈액 내에 요산(尿酸)의 농도가 높아지면서 요산염 결정이 관절의 연골, 힘줄, 주위 조직에 침착되는 질병이라고 한다. 환자의 90% 이상이 엄지발가락에 발생하며 그 외에 발등, 발목, 무릎관절에 나타난다.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주로 나타나며 젊은 사람보다는 4, 50대가 많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 통풍은 인현왕후에게 나타난 증상과는 차이가 있다. 우선 발병 부위가 서로 다르고 연령대나 성별에 있어서도 맞지 않는다. 척추전문의를 만나 인현왕후의 증상을 물었다. 그는 대뜸 통풍이 아니라 척추결핵(spinal tuberculosis)이라 했다. 통풍은 인현왕후처럼 고름이 생기지 않으며 허리 쪽에 발병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의학정보를 뒤졌다. 척추결핵은 결핵균이 혈액 내로 침투하면서 혈류를 타고 이동하다 척추에 정착하여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이다. 척추 자체나 주변 조직의 염증과 괴사로 인해 통증이 심해지고, 증상이 진행되면서 척수 신경 압박 때문에 다리가 저리거나 신경을 따라 통증이 뻗칠 수 있다. 악화되면 손상된 척추뼈 주위에 고름이 형성되고 그것이 주변 조직으로 퍼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당대 최고의 의술을 지닌 내의원 의관들이 왕후의 질병을 잘못 진단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단지 과거에는 요산에 의한 통풍과 감염에 의한 척추결핵을 하나의 통풍증상으로 본 반면 현대의학에서는 전자만을 통풍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차이가 난 것이다. 인현왕후가 앓은 통풍은 현대의학의 척추결핵에 해당하며, 지금 쓰고 있는 통풍(gout)은 요산성관절염이라 불러야 의미가 정확해진다. 결론적으로 인현왕후는 척추결핵으로 사망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승정원일기』에는 1700년 3월 26일부터 이듬해 8월 14일까지 1년 5개월 동안 인현왕후의 병세와 치료에 관련된 500여 건의 내의원 보고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의 질병 기록으로 이만큼 상세한 자료가 또 있을까? 질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과거와 지금이 다르지만, 몸에서 일어나는 병증은 인현왕후 때나 300년 뒤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승정원일기』에는 인현왕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수많은 왕과 왕비의 진료기록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의학계에서 『승정원일기』에 관심을 가지고 이 기록들을 활용한다면 새로운 연구 성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쓴이 : 최채기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번역서
      -『승정원일기』(인조/영조/고종대) 번역에 참여
      -『홍재전서』,『졸고천백』,『기언』,『명재유고』,『성호전집』번역에 참여
    • 저서
        -『고전적정리입문』, 학민문화사, 2011
        -『서울2천년사』(공저),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인현왕후의 성은 민씨(), 본관은 여흥(), 존호()는 효경숙성장순(), 휘호()는 의열정목()이다. 형조판서 등을 지낸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다.


      숙종이 세자로 책봉되고 김만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후 숙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김씨가 인경왕후()가 되었지만 20세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1681년 인현왕후가 간택되어 숙종의 계비()가 되었는데 이때 15세였다. 


      인현왕후 민씨의 집안은 서인으로 당시 조정의 실권은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궁녀 장옥정(氏, 희빈 장씨)을 좋아하여 인현왕후 민씨를 멀리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에 의해 장옥정이 궁에서 쫓겨나 궐밖에서 살고 있었다.


      장옥정은 서인(西)과 정치적으로 대립세력이었던 남인()에 속했기 때문에 견제를 받아 후궁으로 머물수가 없었지만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1686년 3년 상을 마치고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 후궁으로 삼았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이자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김석주()가 사망하고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도 세상을 뜨자 8년간 집권했던 서인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숙종은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서인에 염증을 느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였다.

      1688년 희빈 장씨가 왕자 윤(昀, 경종)을 낳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왕자 윤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서인들이 숙청되기 시작했고 이 문제로 1689년 숙종 15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西)이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인현왕후도 폐위()되어 궁중에서 쫓겨나 서인()이 되었다.


      1693년 무수리였던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잉태하자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도 시들해졌다. 또한 국정을 운영하는 남인에 대한 실망감도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1694년 남인이 주도하는 역모사건이 고변되었고 갑술옥사()가 일어나 서인 소론 세력이 다시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으며 그해 4월 마침내 폐서인되었던 민씨도 왕후로 복위하였다.


      1701년 사망하였는데 소생이 없었으며, 능은 경기도 고양()의 명릉()이다.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인현왕후전()》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