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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崇山)스님 이야기 본문
숭산(崇山)스님의 수행과 득도
숭산(崇山, 1927. 8. 1. ~ 2004. 11. 30) 세수 77세, 법랍 57세
승려대학을 만들어 신불교를 전파하는 등 불교 개혁 활동과, 외국에 불교를 알려 외국인 승려를 배출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었던 대한민국 조계종 승려이다. 당호(堂號)는 숭산(崇山), 법명은 행원(行願)이며 속명은 이덕인(李德仁)이다.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4대 독자)
1940년 순천 공립 학교 졸업
1944년 지하 독립 운동에 가담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풀려남
1945년 평양 평양 공업 고등학교 졸업 후 동국대학교 철학과 입학, 학생운동과 학문으로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닫고 입산
1947년 10월 마곡사에서 계를 받고 출가
수행
수계한지 10일이 지나서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였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종교적인 수행차원에서 얼음을 깨고 목욕을 하였다.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의 중들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숭산스님은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이렇게 짐을 싸고 풀어 놓았던 일이 9번이었다.
50일이 지나니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조금도 없게 되었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하였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 했다.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어서 그는 전신이 다 얼어붙는 듯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서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해주기도 하였다.
몸이 지쳐 잠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있을 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하였다. 80일이 되면서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백일 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 어느 날,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 갑자기 11살, 12살 정도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스님에게 절을 올렸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웠다. 숭산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지만 도대체 어디서 이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가 뒤에서 따라왔는데, 스님이 바위 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걸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치는 소리와 자기의 음성도 들을 수 있었는데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다. 바위와 강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무에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그후 스님은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스님을 만났다. 고봉스님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다.
스님께서는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스님로부터 점검 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다.
고봉스님 앞으로 간 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목탁을 디밀었다. 이 물음에 고봉스님은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대로였다.
숭산은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어떻게 참선해야 합니까?"
고봉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님께서는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할 지를 몰라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
고봉스님은 "모르면 의심 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법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해 봄과 여름 동안에 숭산스님은 항상 행선(行禪)을 하였다. 가을이 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 100일 간의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중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쓰던지 다른 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 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다.
다음 날 밤에는 법당 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다. 어떤 사람이 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셋째 날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 밖의 고무신 70 켤레를 가져다가 덕산스님의 방앞 댓돌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워서 숭산스님의 만행이 들통났다.
다음날 그는 대중들 앞에서 대중 공사를 받게 되었다. 그곳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비구니들은 그를 미워했지만) 선사는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 만 했다.
스님은 자신의 삶에서 그렇듯 신통한 일들이 일어나자 수행을 지도해 줄 스승을 찾기 시작했다.
득도
맨 처음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는데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였다.
일체 법은 나지 않고
일체 법은 멸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
다음으로 그는 큰 비구니 스님을 찾아갔다. 큰 비구니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하니,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꾸짖었다. 그때 숭산스님이 웃으며 "이 세상이, 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어찌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 라고 스님이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 다음으로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 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스님이었다. 숭산스님이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다.
"스님, 제가 어젯밤에 삼세제불을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스님은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스님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보았다. 그런 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다.
숭산스님이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아하, 이 사람 큰일 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 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 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스님이 웃으며 "아하!" 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 없이 술술 대답하였다. 드디어 춘성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스님은 고봉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다. 고봉스님은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전통 임제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다.
고봉스님의 명성에 당시 승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스님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 채 고봉스님의 절을 찾아갔다.
그가 고봉스님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하고 고봉 스님이 말했다.
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 주십시오"
이 말에 고봉스님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스님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이게 스님의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스님이 빙긋이 웃고 말했습니다.
"나쁘지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지만 몇 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스님은 1,700가지 공안 중 어려운 것을 골라 물었는데, 숭산스님이 막힘없이 모두 대답했다.
이를 본 고봉스님은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서식야반 반기기파라.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또 다른 '여여한' 답을 말했다. 고봉스님은 고개를 흔들었다.
참다 못한 숭산스님은 화가 났고 또 실망했다.
"춘성스님, 금봉스님, 금오스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 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라!"
50여 분간 고봉스님과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 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하더니 그때 갑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즉여'라는 대답이다.
고봉스님은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을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스님을 얼싸 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다음 해인 1949년 1월 25일, 고봉스님은 행원스님에게 정식으로 법(法)을 전하는 건당식을 열었다. 이 건당식에서 행원 스님은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이로써 스님께서 고봉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고봉스님이 주었던 최초의 전법이었다.
건당식이 끝나고 고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00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스님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그때의 나이 22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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