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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기쁨 본문
《성무일도》- 시편 149, 150.
《소성무일도》 p 831, 941
교회의 자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은 그들의 왕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리라(헤시키우스).
시편 149
성인들의 기쁨
주님께 노래하라 새로운 노래 *
성도들의 모임에 그 찬송 울리어라.
기뻐하라 이스라엘 그를 내신 주님 두고 *
시온의 아들네는 즐기어라 그 임금 두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주님 이름 찬미하라 *
북치며 고를 타며 당신을 찬양하라.
당신 백성 괴옵시는 주님이 아니신가 *
낮고 낮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꾸미시네.
영광이라 성도들은 춤이 무르익어라 *
자리마다 기꺼움이 흐뭇하거라.
하느님의 찬송이 그들의 입에 *
쌍날칼이 있거라 그들의 손에.
이로써 악한 무리를 복수하리라 *
뭇 나라 백성에게 벌을 주리라.
그들의 임금들을 사슬로 묶으리라 *
그들의 귀족들을 고랑에 채우리라.
이미 내린 심판대로 그들에게 함이어니 *
이 바로 그 성도들 모든 이의 영광이어라.
시편 150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님을 찬미하라. 그의 성소 안에서 *
우람한(그의) 하늘에서 주님을 찬미하라.
그 하신 일 놀라워라 주님을 찬미하라 *
그지없이 크오셔라 주님을 찬미하라.
나팔소리 우렁차게 주님을 찬미하라 *
비파와 고를 타며 주님을 찬미하라.
손북 치며 춤추며 주님을 찬미하라 *
현악기에 피리로 주님을 찬미하라.
처르렁 바라 치며 주님을 찬미하라 *
바랏소리 울리며 주님을 찬미하라.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미하라.
전례에서 무용과 연극의 기능
[출처] -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다니엘 키스터(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예수회신부)
무용과 연극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예술 형식들이 과거 그리스도교 전례에 많이 이바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신학적 이유로나 문화적인 이유에서나 무용과 연극은 정당하게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 글에서는 서구 전례 전통에서 무용과 연극이 예술사적으로 기여해 온 바를 밝혀내고, 오늘날 한국의 전례에서 무용과 연극이 할 수 있는 역할의 신학적 근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전통 전례 무용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무용의 역사는 미미하다. 인도나 자바 섬, 한국의 무속 같은 비그리스도교 문화의 풍부한 종교 무용 전통과 비교해 볼 때, 그리스도교의 종교 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시대의 무수한 교회에서 성직자와 신자들은 차분하고 냉정한 전례의 핵심부를 감싸는 성스러운 무용을 했다."1)라는 휴고 라너의 말은 그다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나 순교자의 무덤가에서 춤을 추어 순교자들의 축일 전야를 축하했다. 그러나 무용이 순교자의 영광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믿음 속에 함축되어 있는 기쁨을 표현하기에 적합한데도, 축일에 관한 역사 기록들은 주로 교회의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주교들은 주기적으로 이러한 축일 전날의 특징이었던 '춤과 상스러운 노래'나 '음란한 동작과 합창들'을 비난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2) 그러나 주교들이 비난한 것은 그러한 춤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저급한 축제의 경향이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무용으로 축일을 축복해 왔다.
수세기가 지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용을 주로 예수 성탄 대축일과 예수 부활 대축일 행사에 가미시켰고, 중세 말엽에는 그런 대축일의 전례에 무용을 결합시켰다. 예수 성탄 대축일에는 종종 무용을 성무일도 찬송의 연장으로 가미했다. 프랑스의 많은 성당에서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저녁기도 직후에 부제들이 성인을 기리는 응답송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을 맞았다. 마찬가지로 사제들은 성 요한 축일을, 성가대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을, 차부제(次副祭)는 주님 세례 축일이나 주님 공현 대축일을 귀에 거슬리고 고의적으로 불경스런 '바보들의 축제'(Feast of Fools)로 맞이했다.3)
부활절을 경축하고자 일부 프랑스 교구 성직자들은 주교 관저 뜰이나 대성당에서 예수 부활 대축일이나 그 다음날 오후에 모여, 주교가 주재하는 자리에서 무용을 했는데, 여기서 이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광명을 상징하는 공을 서로 던지곤 했다. 오세르(Auxerre)에서 이들은 부활찬송인 'Victimae paschali laudes'의 리듬에 맞춰 흥겹게 나아가면서, 대성당 바닥의 보도에 새겨진 미로에서 춤을 추었다. 이 무용에 관한 설명에 따르면, 부제는 "왼손에 공을 들고, 이어지는 송가의 흐르는 듯한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부제가 이번에는 이 사람에게 다음에는 저 사람에게 하는 식으로 공을 넘겨주거나 던져주면서, 화관 모양의 미로에 따라 춤을 추었다."4) 어둡고 한스러운 막다른 골목 같은 삶에서 벗어나 부활의 희망으로 자유로워진 이들은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인간을 빛으로 이끄시는 부활하신 태양인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춤을 춘 것이다.
부활절에 쓰인 어떤 무용은 18세기까지 브장송(Besancon)의 대학 성당에서 계속되었다. 그 성당의 의례규정에 따르면, 부활 대축일 오후에는 "성당 안뜰에서, 비가 오면 성당 한가운데에서 노래와 함께 무용을 했다."5)고 한다.
이태리 피렌체 교구 박물관 - 성가대석(Cantoria) 일부
스페인의 몇몇 대성당에서는 최근까지 무용이 전례의 일부로 남아있었고, 세비야 대성당에서는 지금도 존속되고 있다. 스페인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을 무용으로 장식했다. 이러한 무용 전통에 따르면, 열두 살 가량의 소년들 여섯 명이나 열 명이 고대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황혼 무렵에 대성당에서 자신들의 노랫소리와 상아로 만든 캐스터네츠의 박자에 맞추어 공경하는 태도로 춤을 추면서, 느리고 우아한 궁정 무곡(파반)의 동작으로 전례의식을 행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에는 제단의 성체 현시 전에 주교가 있는 자리에서 이 무용을 했다.
무용을 곁들인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20세기의 한국인 신자들에게는 성체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참으로 어색하게 보일 수 있으며, 중세 프랑스 성직자들의 부활시기 무용이 실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무용은 깊은 경외감을 표현할 수 있으며, 그 다양한 리듬은 인간 삶의 움직임에 깊이 참여함으로써 흘러나온다. 전례의 한 수단으로서 무용은 시편에 나타나는 다양한 감정들을 잘 표현해 주며, 전례의 특징이 되어야 할 형제자매의 성체 안에서의 기쁨과 일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무용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강생하셨다는 확신과 부활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 알맞은 예술형태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나 인간에게 하느님을 표현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신체 표현이 지니는 지고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에, 곧 육신으로 부활하셨기에, 육체적 예술인 무용의 우아한 동작은 모든 인간이 열망하고 그리스도인들이 확신의 기쁨 속에서 애써 향해 나아가고 있는 약속된 조화와 자유의 징표이다.
성서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자신의 구원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은 불교의 선과 같은 정(靜) 속에서가 아니라 움직임 안에서이다. 따라서 제라르 반 데 레으브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타당하다고 하겠다. "성서에서는 움직임이 가장 소중하다. 하느님은 움직임이시다. 그분께서 보내주신 성령께서는 혼돈의 바다에서 떠다니시며, 그분의 불기둥은 사막을 지나 인도하고, 그분의 예언자들이 평온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불안을 가져오며, 그분의 아들이 지상으로 강생하시고, 성령께서 휘몰아치신다. 하느님의 창조는 무거운 작품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의 전진이다."6)
성서의 웅대한 계획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역사의 격류를 통과하는 하느님 백성의 행진이다. 하느님의 종들의 개인사를 보면, 그것은 홍해를 건넌 다음에 춤을 추며 주님께 혼신의 감사를 드리는 한 미리암이고(출애 15,20`-21), 야훼의 법궤 앞에서 환희 속에 춤을 추는 다윗이다.(1사무 6,12-16). 나지안조(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오는 그의 무용을 "하느님을 따라 우아하고 끝없이 변화하는 우리네 인생의 움직임의 상징"7)이라고 했다.
성서에 나타나는 무용에 관한 논의에서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무용의 고유한 육체적인 움직임에서 눈을 돌려, 영적인 관점만으로 바라보고 무용을 영혼의 움직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마태 11,17)라는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암브로시오 성인은 무용을 "영혼의 갈채"라고 정의했고,8)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무용이 사람의 사지를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9) 그리고 라바누스 모뤼스(Rabanus Maurus)도 무용을 "열렬한 마음의 헌신과 사지의 종교적 경쾌함"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마태오의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육체적 함의를 완전히 없애버린 셈이다.10)
그러나 중세시대의 시인들은 바로 그 육체적 성격 때문에 무용을 그리스도 강생의 적절한 이미지로 보았다. 강생하신 성자가 창조적인 새로운 리듬을 세상에 가동시키기에, 다음의 시 구절은 외견상 가벼운 기상(奇想)보다 훨씬 더 올바르게 그리스도의 삶과 활동과 약속을 표현하는 데 무용의 이미지를 사용하게 한다.
내일은 내가 춤추는 날, 나의 임이 우연히
나의 놀이의 뜻을 알았으면 좋겠네.
나의 임을 내 춤에 초대할 거야.
노래하라,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내 사랑, 내 사랑.
나의 임을 위해 나는 이렇게 했네.
그때 나는 순결한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그분에게서 육신을 받았네.
이처럼 나는 인간의 본성으로 짜여져,
나의 임을 내 춤에 초대하지. 노래하라, 오! …….
이 시는 그리스도의 초기 행적을 추적하고 그리스도의 세례를 회상한 다음, 곧장 절정으로 옮겨간다.
그 다음에 나는 십자가에 매달렸네,
창이 심장을 스쳐 피와 물이 흘러나왔지.
나의 임을 내 춤에 초대하려고. 노래하라, 오! …….
그러고는 지옥으로 내려갔지, 나의 임을 구원하고자.
그리고 사흗날에 다시 올라왔네. 나의 임과 춤으로. 노래하라, 오! …….
그 다음에 하늘로 올라가, 거기에서 이제 영육으로 머무르네.
천주의 오른편에서, 인간이
춤추는 군중에게 오기 위해. 노래하라, 오! …….11)
이보다 최근에는 휴고 라너가 무용의 종말론적 의미를 지적했다. 그에게 종교 무용뿐 아니라 무용 일반은 인간 안에 있는 비밀의 징표이다. 곧 "모든 무용의 가장 심원한 비밀은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육화된 영혼의 내부 깊숙이 놓여있는,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에 대한 소망과, 그리고 우리가 '하늘'과 '천국'과 '육신의 부활'이라고 부르는 영혼의 최종적인 행복한 육화에서, 구원받은 인간에게 드러나고 약속된 소망의 완성에 있다."12) 한국적 의미에서 모든 무용의 비밀은 한(恨)에 서려있는 소망, 곧 하느님 안에서의 완성에 대한 소망에 있다. 그 소망은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 그리고 육신의 부활에 대한 그분의 약속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그리스도교 전례 수단으로서 무용은 특히 파셔가 시편의 기도를 특징지으며 언급한, 회중이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는 전례 부분에 적합하다.13) 그리스도교의 기도에는, 회중이 하느님의 말씀에 주로 귀기울이지도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 청원하거나 감사를 드리지도 않으며, 회중의 일치와 사랑의 징표를 표현하지도 않고, 단순히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바를 표현하는 때가 있다. 곧 회중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 앞에서 노래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가톨릭 전례는 그러한 순간에 회중의 기도에 배어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뒷받침하려고 시편을 이용하며, 무용이 가장 적합하게 보이는 때가 바로 이와 같은 시편을 기도하는 순간이다.
전통 전례 연극
만일 그리스도교 회중이 모든 힘을 다해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면, 그분 말씀이 그 안에서 살아있는 힘으로 선포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선포의 생명력을 보증하는 수단으로서, 또 다른 예술양식, 곧 연극예술이 서구 전례에 기여해 왔고 오늘날의 한국 전례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종교 무용에 관한 많지 않은 기록과는 대조적으로, 중세 전례극의 많은 예가 역사 기록에서 발견된다.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그리고 심지어 몇몇 경우에는 그후에도, 성직자들은 단순한 연극적 기교를 이용해 성서의 극적인 사건들을 표현했다. 이러한 극적 표현들은 더욱 정교(精巧)화되고, 점차 교회 밖으로 나아가서 실제 전례행위와는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서구 드라마 부흥기에는 짧고 단순한 막간극이 성무일도나 미사전례와 일치된 기능을 했다.
이들 초기에 공연된 연극 중 많은 것들은 연극예술이 여러 세기에 걸쳐서 성숙해 온 것으로서, 오늘날 보기에는 예스럽고 소박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예스러운 스타일이지만, 잘된 작품들에는 연출을 맡은 성직자들의 날카로운 연극적 감각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세의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위해서 자신들의 재능을 사용하고자 했으며, 하느님의 말씀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단순한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전례에 참례하는 회중 안에서 현존하고 그 뜻을 발휘하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의 노력으로 전례형식을 왜곡하지도 않고 전례행위와 동떨어지지도 않으면서, 전례에 내재하는 리듬 속으로 회중을 더욱더 확실하게 이끌어가는 일종의 연극을 창출해 내기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노력을 예수 성탄 대축일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집중했다. 성탄절 작품들은 목자들이 오는 이야기와 동방박사의 이야기에서 주로 발전된 것이다. 부활절과 관련한 일부 작품들은 부활송가에서 나왔는데, 이 송가의 생생한 대화는 그 리듬이 서정적이어서 쉽게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별 어려움 없이 연극작업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활절 막간극들은 유명한 'Quem quaeritis'(누구를 찾고 있는가)에서 발전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경탄할 만한 연극작업 몇 가지를 보면, 중세 성직자들이 어떤 연극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연극을 어떻게 전례의식과 융합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Quem quaeritis'의 핵심적인 형식은 그리스도의 무덤가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천사들이 간단히 대화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입당송에 삽입되어 불린다.
천사들:오, 그리스도인들이여, 무덤에서 누구를 찾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오, 하늘에 계신 이들이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자렛의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천사들: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께서 부활하셨다고 가서 전하여라.14)
이 간단한 텍스트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무수하게 극화된 작품들의 근간을 이루었다. 일부는 미사 시작부분에서, 일부는 성무일도 동안에, 일부는 전례와 독립적으로 공연되었다. 일부 판본은 매우 단순하고, 다른 것들에는 그리스도를 묘사하려고 일부러 등장인물 한 명을 덧붙이기도 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까지 달려가는 장면을 가미하거나, 또는 부활송가를 포함하기도 했다.
연극과 전례 모두에 경탄할 만한 작품인 'Quem quaeritis'의 한 판본에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당에서의 부활 대축일 미사(아마도 성야미사)가 도입되어 있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성가대의 선창자가 보조자들과 흰색 달마티카를 입은 소년 두 명과 함께 성가대 입구 앞에 서있다. 흰색 부제복을 입은 부제 두 명은 성 마르티노의 무덤 앞에 서있다. 그들(부제들)은 성가대 선창자 쪽으로 돌아서서 노래하기 시작한다.
부제들:너희는 누구를 찾고 있는가?
선창자 앞에 서있는 소년 두 명이 대답한다.
소년들:나자렛의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부제들: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소년들: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네.
그 다음, 한 소년이 노래한다.
첫 번째 소년:그리스도의 광명!
다른 소년이 대답한다.
두 번째 소년: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를 매번 더 큰 소리로 번갈아가며 세 번 반복한다.
그 다음, 두 소년은 선창자 쪽으로 돌아서서 인사하고 말한다.
소년들: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노래합시다!
그러면 성가대 선창자가 미사를 시작한다.15)
물론 이 짧은 막간극은 주요한 연극작품에 끼이지는 못하지만, 이것의 직접성과 강도는 몇몇 상징적인 소품들과 몸짓의 도움으로, 회중을 곧장 하느님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준비단계로서, 기쁨에 찬 기대를 갖도록 강력히 유도했음에 틀림없다. 전례활동을 방해하거나 회중의 참여를 분산시키기는커녕, 이 막간극은 예수 부활 대축일의 시작에 잘 들어맞는 환희의 감정을 북돋운다.
10세기의 한 텍스트에는 조금 더 정교한 'Quem quaeritis' 판본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판본은 부활 대축일 이른 아침, 아침기도 끝에 공연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성금요일 전례 후에는, 십자가가 제단 주변에 휘장으로 싸인 '무덤'에 '묻혔다.' 부활 대축일 아침기도가 끝날 무렵에는, 무덤을 지키는 천사 역할을 맡은 한 수도자가 장백의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쥐고서 무덤가에 자리를 잡았다. 세 번째 시편 중에, 세 명의 다른 수도자들이 카파를 입고 향로를 든 채로, 그리스도의 몸에 뿌릴 향료를 가지고 온 세 명의 여자를 모방하여 무덤가로 나아갔다. 그들은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천사는 부드럽고 달콤하게 노래를 시작한다.
- 너희는 누구를 찾고 있는가?
이렇게 노래하자마자, 세 명이 함께 대답한다.
- 나자렛의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앉아있는 천사가 말한다.
-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그분 말씀대로 부활하셨다. 그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서 전하여라.
이 명령에 세 명의 수도자는 성가대 쪽으로 돌아서서 말한다.
- 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네.
이렇게 노래하면, 앉아있는 그가 마치 그들을 되부르는 것처럼 응송한다.
- 그곳(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곳)을 와서 보아라.
그 다음에, 천사는 일어나 베일을 들어올리고는, 그곳에 십자가가 없고 오직 십자가를 쌌던 수의만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준다. 이를 보고서, 세 사람은 그 무덤에 향로를 내려놓고, 수의를 집어 사제단 앞으로 들어올린다. 그러고는 마치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더 이상 수의에 싸여있지 않음을 보여주듯이, 다음과 같이 응송한다.
-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네.
그런 다음 그들이 수의를 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응송이 끝났을 때, 수도원 본원장은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신
우리 왕의 승리를 기뻐하며, 성가 'Te Deum laudamus'를 부른다.
곧 종소리가 울려퍼진다.16)
비록 현대적 감각으로는 이 극적인 양식이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이 판본의 복음서 내용을 다루는 경탄할 만한 방식과 전례를 위해 모인 회중의 활동을 가미시키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극적인 요소들이 성서가 모호하게 남겨놓은 부분을 상세하게 묘사하려 한다고 해서 복음서의 힘을 파괴시키지는 않는다. 더욱이, 배우들의 행동이 단독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전체 회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행동, 곧 절정에 달하는 사은찬미가(Te Deum) 합창을 유도하고 있다. 행동은 먼 과거에 속하거나 무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례에 참여한 회중의 것이다. 회중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기쁜 믿음을 효과적인 연극인 동시에 훌륭한 전례이기도 한 절정에 달한 극적 경험으로 표현한다.
'Quem quaeritis'에 대한 이와 같은 연극작업들은 부활 대축일의 기쁨을 드높였다. 아주 단순한 다른 연극 기교들은 성금요일 전례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의 죽음에 따른 슬픔을 심화시켰다. 강렬한 슬픔을 담은 비가에서 성모 마리아 역이나 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있었던 다른 인물 역을 맡은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부짖었다. 툴루즈에서는 성직자 두 명이 아침기도가 끝난 직후에 휘장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단상에서 이러한 비가를 부르곤 했다. 이들이 노래하자, 성당의 모든 촛불이 점차 꺼지고, 공동체의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비극적 상실감을 심화시키는 단순한 연극적 수단으로서 단 하나의 촛불만이 남았다.17)
물론 미사에서 정규적으로 수용되었던 전례극이 사라진 지 오래된 다음에도, 촛불이나 행진 그리고 사제의 상징적인 몸짓과 같은 단순한 연극장치들은, 가톨릭 의례의 특징이 되어왔다. 오늘날의 전례 참가자들은 전례에 몇 가지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전례의 의미를 심화시킬 수 있으며, 중세 성직자들의 예를 따라서 연극예술을 이용해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를 강조할 수 있다. 시각적, 감각적 표현수단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적 맥락에서는, 단순한 말로는 그 말씀의 활기찬 의미를 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연극적 수단은 중세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구원의 핵심적인 사건들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수단들은 또한 성서의 여타의 사건과 우화,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서 주요한 순간들, 그리고 믿음의 눈을 통해 바라본 현대의 사건들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한국의 여러 본당에서 흔히 진행되는 성탄절 청소년들의 공연뿐만 아니라 어느 대축일의 미사 중에서 막간의 연극적 독서나 공연형식도 취할 수 있다. 한국의 민속극은 전례에서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단순하고 명확하며 서로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귀중한 연극적 기교를 제공할 수 있다.
전례에서 연극이나 무용을 이용하려면 예술이 그 전례에서 차지하는 기능상의 역할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이 요구된다. 성가는 전례에 알맞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 쉽사리 비종교적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건축과 회화는 청중의 관심을 미사의 중심적 활동에 모으기보다는 분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심지어 연극예술이나 무용은 더욱더 전례를 왜곡하고 전례에 참가한 회중들을 산만하게 만들기 쉬운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연극이나 무용을 이용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전통예술의 도움을 받아 기도를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야훼께 새 노래를 불러라." 하는 권고(시편 149,1)에 귀기울이고, 법궤 앞에서 "야훼 앞에서 덩실거리며 춤을 추는" 다윗 왕을 모범(2사무 6,14)으로 삼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오랜 전통을 따를 것이다.
다윗의 아내 미갈은 그날 다윗을 보고 "건달처럼 신하들의 여편네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온통 드러내시다니!" 하고 춤을 추는 것에 대해 책망했다(2사무 6,20). 그러나 이 일을 기록하는 사무엘서의 저자는, 찬양하는 행동이 경망스럽고 솔직하다고 다윗을 책망하기보다 오히려 미갈의 무정한 태도를 비난하고 있다. (라종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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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go Rahner, Der Spielende Mensch, Einsiedeln:Johannes Verlag, 1952년, 70면.
2) 톨레도 제3공의회, 캐논 23, Mansi 편, 9(Florence:Zatta), 1763년, 999면; 아비뇽 공의회, 캐논 17, Mansi 편, 22(Venice:Zatta), 1778년, 791-792면.
3) L. Gougaud, "La Danse dans les eglises", Revue d'Histoire ecclesiastique 15(1914년), 232-234면 참조.
4) Domino du Gange, Glossarium mediae et infimae Latinitatis, 4권, L. Favre 편, Graz:Akademische Druck, 1954년, 253면에서 재인용.
5) L. Gougaud, 앞의 책, 235면에서 재인용.
6) Gerard van der Leeuw, Sacred and Profane Beauty:The Holy in Art, D.`E.`Green 옮김, New York:Holt, Rinehart, and Winston, 1963년, 74면.
7) Oratio 5(Contra Julianum, 2), 35:PG 35, 709-712.
8) Epistola 58.8:PL 16.1280.
9) Sermo 311(In Natali Cypriani, 3), 6:PL 38.1416.
10) Commentaria in Mattheum 4.11:PL 107.913.
11) William Sandys, Christmas Carols, Ancient and Modern, London:Richard Beckley, 1833년에서 재인용.
12) Hugo Rahner, "Vom Sinn des Tanzen", Geist und Leben 38(1965년), 12면. 이러한 사상에 따르면, 라너는 Der Spielende Mensch, 59면 이하에서 일종의 무용 신학을 논의한다.
13) Joseph Pascher, "Singen vor Gott", Munchener Theologische Zeitschrift 17(1966년), 164면 이하.
14) Karl Young, The Drama of the Medieval Church, 1권, Oxford:Clarendon Press, 1933년, 210면 참조.
15) Edmund Martene, De Antiquis Ecclesiae Ritibus, 3권, Antwerp:de la Bry, 1737년, 485-486면 참조.
16) O.`B.`Hardison, Christian Rite and Christian Drama in the Middle Ages, Baltimore:Johns Hopkins, 1965년, 193-194면 참조.
17) K.`Young, 앞의 책, 493면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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