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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의 세계

고전산문 - 생의 마지막에

성지 2017. 8. 16. 15:44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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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2017년 8월 7일 (월)
사백아흔한 번째 이야기
생의 마지막에
번역문

   몸 밖의 영화와 몰락, 안락과 근심 같은 것은 마땅히 모두 하늘이 하는 바를 따르되 마음에 담지 마라. 저절로 이르는 것이라도 옳은 것을 가려서 받고, 이르지 않는 것은 이를 구할 까닭이 없다. 이것이 바로 죽을 때까지 발을 붙이고 서 있을 자리다. 조금이라도 옮기거나 바꿔서는 안 된다. (중략)


   나는 일찍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셔서, 배움이 정밀하지 않았는데도 앞으로 가기를 원했고, 덕이 서지 않았는데도 나아가려고 했다. 바람 먼지는 자욱하고 해와 달은 빛을 잃어 위로는 임금을 요순의 경지로 이끌지 못했고, 아래로는 나 자신을 고요(皐陶)나 기(夔) 같은 반열에 두지 못했다.


맹수의 어금니와 독사의 독이 여기저기서 달려들고 침범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심하게 버려지고 오랫동안 후회한 것을 도리어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느냐? 이것이 내가 자신을 징계하고 너희에게 바라는 것이니, 밖에서 이르는 것을 나의 영화로 삼으려 하지 말거라. 이제 형장의 칼날이 문 앞에 이른 것을 보고 종이를 빌려 간신히 쓴다. 너희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원문

若乃身外之榮悴休戚, 卽當一切聽天所爲, 而無容心焉. 其自至者, 亦擇其可而受之, 其不至者, 則無求之之理也. 此是終身立脚地位, 不可分寸移易. …… 余則早忝不幸, 學未精而求進, 德未立而欲行. 風埃汩汩, 日失月亡, 上未能導其君於堯舜, 下未能置其身於皐夔. 獍牙虺毒, 左侵右觸, 致有此境, 昏棄之甚, 悔懊之久, 尙何足言乎? 是余懲於己, 望於汝, 不欲以自外至者爲吾榮也. 見今鋒鏑臨門, 借紙艱草, 汝等沒身不忘, 可也.

-한충(韓忠, 1486-1521), 『송재집(松齋集)』 「계자서(戒子書) 신사년 12월 27일 옥에서 임종할 때




해설

   인생은 어느 순간을 살아가든, 어느 날엔 반드시 죽음을 맞는다. 단 한 번뿐인 인생,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인간은 무슨 말을 남길까? 『논어』 「태백(泰伯)」에서는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하다.[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라고 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았든 간에, 죽음을 앞둔 인간의 말은 가장 선하고 참되다는 뜻이다. 산 자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 유언이다. 유언은 가장 진실하면서 슬픈, 떠나가는 이의 마지막 부탁이다.

 

   한충(韓忠)은 조선 중종 때의 문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서경(恕卿)이다. 서재를 지어 그 주변에 세 그루의 소나무를 심은 후 ‘삼송정(三松亭)’이라 이름 붙인 후 송재(松齋)로 호를 삼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이 많았다. 성품이 진솔하고 강직했으며 총명했다. 27세에 별시(別試)에 장원급제한 후 벼슬을 밟아갔다. 정치 혁신을 단행하던 조광조(趙光祖) 밑에 들어가 도의의 친구를 맺고 개혁에 동참했다. 남산의 조용한 곳에 집을 짓고 살 때는 업무를 끝내고 돌아오면 조광조, 김정(金淨)과 함께 이불과 긴 베개를 두고 같이 잠을 자기도 했다.

 

   인생에는 내게 도움을 주는 친구도 있지만, 해를 끼치는 사람도 있다. 싫은 사람과 잘못 얽히면 자칫 삶을 큰 비극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한충의 나이 서른셋에 주청사(정치, 외교적으로 요청할 일이 있을 때 중국에 임시로 파견된 사신)인 남곤(南袞)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을 가게 되었다.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잘못 기록한 중국의 문헌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이었다. 남곤은 평소에 한충이 아첨꾼으로 여긴 훈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도중에 남곤이 병이 들었을 때 부사인 이자(李耔)가 약을 지어 먹이려 하자 한충이 말렸다. “저 자는 반드시 사류(士類)를 피로 물들일 것이오.” 이 말이 남곤의 귀에 들어갔다. 남곤은 몹시 기분이 나빴고 한충을 해치고자 했다. 점쟁이를 몰래 불러 한충의 길흉을 물어볼 정도였다. 귀국 후에 한충이 직제학을 거쳐 좌부승지로 계속 승진하자 남곤은 엉뚱한 구실을 붙여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쫓아내 버렸다.

 

   곧이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남곤·심정(沈貞) 등 훈구파가 개혁 정책을 펼치던 조광조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한충은 조광조의 측근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감형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날 즈음 이번엔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났다. 훈구파를 없애기 위한 회합 모임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이때 명단 중에 황서경(黃瑞慶)이란 이름이 있었는데, 서경(瑞慶)이란 이름이 한충의 자와 같았다. 남곤이 이를 빌미 삼아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한 인간에게 밉보인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한충은 더 이상 살아서 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죽음이 바로 앞에 있었다. 애써 얻었던 사회적 인정, 영화로움은 닥쳐올 죽음 앞에서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만 달려갔던 삶에 후회가 밀려왔고 비로소 소중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한충에겐 아들이 셋 있었다. 생의 마지막에 그는 자식들이 떠올랐고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종이를 몰래 구해 아들에게 유언을 썼다. ‘형장의 칼날이 문 앞에 이른 것을 보고 종이를 빌려 간신히 쓴다’는 마지막 말이 애처롭다.

 

   그가 한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바란 것은 마음을 잘 붙들어 나가고, 부귀영화에 마음 쓰지 말며, 저절로 오는 행운일지라도 옳은 것만 취하고, 오지도 않는 것에 아등바등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느 계자서(戒子書)와 같이 공부해라, 가문을 빛내라는 딱딱한 훈계가 아니었다. 세상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담담한 당부의 말이었다. 마지막 말에 이르러 지내온 나날을 반성하고, 죽음으로 내몰린 삶에 대한 회한을 내비친 것은 자식들이 아버지의 불행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 비로소 속마음을 열고 덕 없이 나아가고자 했던 어리석은 삶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자신의 삶을 경계함으로써 자식들은 부모보다 더 나은 길을 걸어가기를 바랐다.

 

   곧이어 중종이 직접 신문한 결과 그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풀어줄 것을 명했다. 하지만 다음날 남곤이 보낸 하수인에 의해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훗날 죄가 풀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박수밀
글쓴이박수밀(朴壽密)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미래인문학교육인증센터 연구교수

 

주요 저서
  • 『박지원의 글 짓는 법 』, 돌베개, 2013
  •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다락원, 2014
  • 『옛 공부벌레들의 좌우명』, 샘터, 2015
  • 『고전필사』, 토트, 2015 외 다수의 저역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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